http://www.magnumphotos.com/

1947년에 창설되어 미국과 유럽의 훌륭한 일류보도 사진가들로 구성된 자유사진가집단으로, 회원들의 사진을 언론사에 판매하기 위해 창설된 국제적인 사진통신사로 여기에 속한 사진가 들은 <라이프>등과 같은 언론사의 전속 사진가와 달리 각각 자유스런 입장과 방향을 확보함으로써 사진에 있어 자유롭고 개성적인 모습들을 비출 수 있었다.
로버트 카파 , 데이비드 시모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의 사진작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에도 세계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사진가들이 합류하여 뉴욕, 파리, 런던, 쮜리히에 본부를 두고 활약하고 있는 현황이다.

http://en.wikipedia.org/wiki/Magnum_Photos
여기 위키를 찾아보면 멤버까지 나오는데, 아직까진 한국인은 없고, 일본의 Hiroji Kubota와 이란과 인도인이 끼어 있다. 물론 이 조차도 1986년에 들어간 사람이다.

** 사진계 족보
19세기

1. 초상사진(portraits)
① 나다르(Felix Nadar)
②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ila M. Cameron)
2. 전쟁사진(war photography)
① 로저 펜튼(Roger Fenton)
② 메튜 B. 브래디(Mathew B. Brady)
3. 동체사진(motion picture)
- 이드위어드 머이브릿지(Eadweard Muybridge)
4. 회화주의(pictorialism)
① 오스카 G. 레일랜더(Oscar Gustave Rejlander)
②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
5. 자연주의(naturalism)
-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
6. 포토 캠페인(photo campaign)
① 자콥 리스(Jacob Riis)
② 루이스 W. 하인(Lewis Wickes Hine)

20세기 초(1900~1950) 근대 사진
1. 근대사진의 선구자
① 으젠느 앗제(Eugene Atget)
②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2. 아방가르드(avant-garde)
-바우하우스(Bauhaus)
① 라즐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
② 만 레이(Man Ray)
③ 엘빈 랭던 코번(Alvin Langdon Coburn)
④ 존 하트필트(John Heartfield)
3. 신 사실주의(new realism)
① 폴 스트랜드(Paul Strand)
② 알베르트 렝거-파취(Albert Renger-Patzsch)
③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
④ 안젤 아담스(Ansel Adams)
⑤ 이모젠 커닝험(Imogen Curningham)
⑥ 윈 벌록(Wynn Bullock)
4. 르포르타주(reportage)
① 에리히 잘로먼(Erich Salomon)
② 브랏사이(Brassai)
③ 위지(Weegee)
5. 조형주의(harmonism)
① 해리 캘러핸(Harry Callahan)
② 아론 시스킨드(Aaron Siskind)
③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
④ 빌 브란트(Bill Brandt)
6. 인물사진(portraits)
①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② 유셉 카슈(Yousef Karsh)
③ 아놀드 뉴먼(Arnold Newman)
④ 필립 할스먼(Philippe Halsman)
⑤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esz)
7. 패션사진(fashion photography)
①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② 마틴 문가치(Martin Munkasci)
③ 어빙 펜(Irving Penn)
④ 리차드 아베던(Richard Avedon)
8. 다큐멘터리(documentary)
⑴ FSA
①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② 도로시어 랭(Dorothea Lange)
③ 아더 로드스타인(Arthur Rothestein)
⑵ 그래프 저널리즘(graph journalism)·
- 라이프(LIFE) - 루크(Look)
①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Alfred Eisenstaedt)
②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③ 앤드리어스 파이닝거(Andreas Feininger)
④ 데이비드 D. 던컨(David Douglas Duncan)
⑤ W. 유진 스미스(William Eugene Smith)
⑶ 매그넘(Magnum)
① 로버트 카파(Robert Capa)
② 앙리 까르띠에-브레송(Henry Cartier-Bresson)
③ 데이비드 시무어(David 'Quim' Seymour)
④ 조지 로저(George Rodger)
⑤ 베르너 비숍(Werner Bischof)
⑥ 에른스트 하스(Ernst Haas)

20세기 중반 이후(1950~ ) 현대 사진
1. 인간가족전(A family of man)
2. 신 영상주의 사진가
①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②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3. Contemporary Photographer
①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
② 리 프리들랜더(Lee Friedlander)
③ 개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
④ 브루스 데이비드슨(Bruce Davidson)
⑤ 대니 라이언(Danny Lyon)
4. 그 밖의 현대 사진가
① 랄프 깁슨(Ralph Gibson)
② 제리 율스만(Jerry Uelsman)
③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④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⑤ 잰 그루버(Jan Groover)
⑥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
⑦ 조엘 피터 위트킨(Joel Peter Witkin)
⑧ 얀 사우덱(Jan Saudek)
5. 뉴 다큐멘터리(new documentary)
① 니콜라스 닉슨(Nicholas Nixon)
② 앤디 워홀(Andy Warhol)
③ 낸 골딘(Nan Goldin)
6. 뉴 랜드스케이프(new landscape)
① 리처드 미즈락(Richard Misrach)
② 존 섹스턴(John Sexton)
③ 존 팔(John Pfahl)
7. 뉴 컬러(new color photography)
① 윌리엄 이글스톤(William Eggleston)
② 조엘 메이어로위츠(Joel Meyerowitz)
8.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① 로버트 메플소프(Robert Mapplethorpe)
② 신디 셔먼(Cindy Sherman)
③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

** 사진의 역사

▶1820 - 1840

이 시기는 사진의 실험기이다. 1813년 이후 J.N. 니엡스는 샬롱-쉬르-싸온느(Chalon-saone)에서 일하면서 당시 고안된 석판 인쇄법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그는 석판 인쇄 분필을 대신하여 빛이 드로잉의 수단이 되는 사진 제판법을 개발하고자 했으며, 1827년에는 사진의 수단으로서 복사 판화에 대해 `태양 사진술(sun draw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1822년에 파노라마식 디스플레이의 발달된 행태인 디오라마(diorama)를 발명한 L.J.M. 다게르와 1829년 12월에 공동 연구에 착수했다. 다게르는 파노라마를 만들자 빛의 투사 영상을 정착 시키는 일에 열중하면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실험했다. 니엡스는 1833년에 일생을 마쳤으나 그의 유품들은 다게르가 질산은 동판 위에 영상을 포착하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다게르는 요드화은의 잠재 영상이 수은 증기에 노출될 때 현상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영상은 더운 염류 용액에 감광판을 담금으로써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1837년에 다게르오 타입이 성공하였다. 다게르는 그의 발명품을 이용하여 회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그에게 연금을 준 프랑스 정부에 사진 제판권을 주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33년에 영국의 W.H.폭스 탈보트는 인화지 위에 영상을 정착시키려고 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1835년에 뜻을 이루었다. 그가 사용한 현상액은 갈릭산이었으며, 그 결과는 왁스로 반투명하게 만든 네가티브 페이퍼인데 포지티브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폭스 탈보트는 사진 프린팅의 창시자이다. 그의 탈보타입 및 칼로타입 프린트 제판법은 1839년에 `포토제닉 드로잉`으로 발표되어 특허를 받았다. 히포라이트 바야드도 또한 1839년에 인화지 위에서 사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직접적인 포지티브였다. 더욱이 바야드는 그의 고안품을 다게르처럼 장려시키지 못했다. `사진술(photography : 그리스어 `빛` 이라는 포스(phos)와 `쓴다는 것`인 그라포스(graphos)에서 유래)이라는 용어는 1839년 2월에 영어와 독일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840 - 1870

사진술에 기술적으로 많은 개1840년부터선이 있었다. 빈(Vien)출신의수학자 페츠발광학 기계상 폭트랜더는 렌즈를개선시키고자 했는데 이것이 1857년에 교정렌즈가 되었다. 부싯돌과 크라운 유리에 의존한 렌즈는 1842년 프랑스에서 발명되어 예나의 쇼트(Schott)와 광학 기게상체이스(Zeiss)가 독일에서발전시킨 예나 유리를 극복해야하는 한계가 있었다. 영국의 존 허셀경과 니세포르 니엡스의 사촌인 니엡스 드 생 - 빅토르 는 알부민으로 코팅을 한 네가티브 유리로 성공적인 실험을 했다. 이것은 세부를 빈틈없이 표현했다. 그러나 감광판은 젖은 상태로 노출되어야 했으며, 노출시간은 길었다. 이 사진 제판법은 풍경, 건축 및 미술 재현에 이상적이었다. 알부민 페이퍼는 1850년에 블랑꺄르 에브랑이 소개하여 그후 널리 이용되었다. 1894년, 유럽 최대의 알부민 페이퍼 제조업체인 드레스덴 알부민 페이퍼 제조회사는 하루에 생달걀을 6만개씩 사용할 정도였다. 1851년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는 습식 콜로디온을 소개했다.에테르에 용해된 면화약에서 나온 끈적끈적한 물질인 콜로디온은 요드화 칼륨을 첨가한 유리 감광판 위에 퍼졌다. 그것은 감광성이 매우 높아 노출시간을 분에서 초로 단축시켰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습식 콜로디온은 제판법이 용이하지 않았다. 1855년에 토우페나드박사는 처음으로 효과적인 건판법을 발표하여 1860년에 영국에서 건판이 대량으로 시판되었다. 그러나 사진가들은 1870년대까지 습식 콜로디온을 더 선호했다. 사진가들은 일반의 관심과 시장의 범위를 맞추려고 했다. 폭스 탈보트는 1844년과 1846년에 <자연의 연필(The Pencil of Nature)>을 발표했다. 프로베를의 친구이자 작가인 막심 뒤은 1849 - 50 년에 이집트를 사진 촬영했으며 테이나르는 1851년 - 52년 사이에 촬영을 했다. 그리고 1852년에 로저 펜튼은 러시아를 사진에 담았으며, 1855년에는 크림전재의 경과를 추적했다. 1854년 8월, 살즈만은 에루살렘의 고대 건축물을 기록했다. 1850년대에 많은 건축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훌룡한 것은 아마도 1851년에 창설된 史적 기념위원회가 파괴될 위험에 있던 프랑스의 건축물을 기록한 작품일 것이다. 이 시기에는 특히 건축물에 관한 조사가 많았다. 1850년대 말에 끌로드 샤르내는 멕시코 건축물에 관한 사진을 찍었으며, 리나우 트 도 같은 시기에 버마에서 활동했다.사진가들은 조직을 만들었다. 1851년, 파리에서 <태양사진협회(Societe Heliographique)>가 결성됐으며, 1853년에는 런던에서 <사진협회(Photographic Society)>결성되었다. 사진촬영은 이제 인기 직업이 되엇다. 1850년대 초에는 명함( carte de visite)포트레이트가 유행했으며 사진 영상도 원숙해졌다. 이름과 신원을 덧붙인 사진들은 말보다는 영상이 문제가 되었다. 디스데리(Disderi)는 하나의 유리 감광판 위에 10장의 사진을 찍는 사진기를 사용함으로써 명함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1860년 대에 많은 사람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이 이런 작은 포토레이트를 널리 수집했다. 명함은 입체사진시장에서처럼 그 이후 19세기 내내 계속 유행했다. 입체 묘사는 1830년대와 그 이전에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에든버러의 데이브드 브루스타와 파리의 쥴 두보스끄같은 연구원들이 입체 사진용 사진기와 1850년대 뷰어의 발전을 유도하여 856년에는 뷰어를 모든 제도실에서 볼 수 있었다. 1861년에 올리버 웬델 홈즈는 수동 입체사진경을 발명했다. 미국인들은 입체사진이 빛을 잃어가는 1890년 대까지도 입체사진에 심취했다. 또 다른 발전은 인화 기술이 향상되었다. 1864년에 스완이 훌륭한 색조범우와 더불어 내구력있는 프린트가 되는 카본 인화법을 소개했다. 카본인화법은 올드 마스터(old master:16-18세기 유럽 대화가와 구작품들을 일컷는 말)의 드로잉 복사를 위해 알사의 아돌프 브라운이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양질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다. 영국에서의 소유권은 1873년 - 74년에 존 톰슨의 <중국과 중국인에 관한 삽화>를 출판한 오토타입사가 가지고 있다.

▶1870 - 1900

1871년에 사우스앰프톤의 매독스박사는 브롬화은과 젤라틴을 사용하는 새로운 사진 감광유제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것은 1870년대에 걸쳐 개선되어서 1878년부터 젤라틴 건판이 시판되었다. 이 건판은 이전에 습식 콜로디온에 의해 못쓰게 된 사진기에 대해 부드럽고 편리해서 고속촬영을 가능케 했다. 1850년대부터 매거진 사진기와 롤러 슬라이드 기법에 관심을 가진 연구가들은 사진기 프레임에 두개의 롤러를 사용했다. 그리고 런던의 레온 워너크는 1875년에 광택지에 적합한 인도 고무와 콜로디온으로 제조된 고급 물체인 스트리핑감개를 가진 사진기를 개발했다. 1861년에 발명된 셀룰로이드는 꾸준히 개선되었다. 1888년에 필라델피아의존 카부트는 셀룰로이드에 바탕을 둔 굴절성있는 네가티브 필름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조지 이스트만과 워커도 또한 굴절성 있는 필름과 가벼운 사진기를 실험했다. 1888년에 조지 이스트만은 롤 필름 장치가 장착된 코닥 사진기를 소개했다. 그리하여 이스트만사가 현상한 100자의 사진이 재장전된 사진기와 함께 주인에게 돌아왔다. 1889년부터 코닥은 1887년에 한니발 구드윈경이 개발한 니트로셀룰로스 필름을 사용했다.주로 독일에서 제조된 알부민 페이퍼는 여전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결국 1890년 대에 알부민 페이퍼보다 민감한 젤라틴 - 클로라이드 인화지로 대체되었다. 둘 다 내구성이 좋았다. 자동 인화기는 새로운 고감도 인화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 상세한 실험. 관찰에 대한 정보 욕구가 스냅사진 제작 실험에 박차를 가하게했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한 영국의 지형 사진가 에드워드 머이 브리지는 질주하는 말의 움직임을분석하기 시작하여 1877 - 78년에 리랜드 스탠포드의 재정적인 후원으로 성공했다. 머이 브리지는 1884년이후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계속 연구를 햇다. 그 당시 파리의 마레와 그보다 약간 뒤에 브레 슬라우의 오토머 안쉬츠도 유사한 일을 하고 있었다. 이같은 추진력이 `영화 촬영술`과 영화 촬영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영국의 프리즈 - 그린은 1889년에 그의 사진 제판법의 특허를 얻었다. 토머스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는 각각 미국과 프랑스에서 그 제판법을 개척했다. 수동 사진기는 아마추어에게 거리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수동 사진기 중에서 어떤 것은 오히려 짐이 되기도 했는데, 1889년에 개발된 폴 마틴의 `패실(facile)' 수동 사진기는 12개의 감광판을 채우면 무게가 4파운드가 넘어서 마치 작은 여행가방처럼 보였다.진짜 소형 사진기는 주광 장전(daylight-loading)롤 필름처럼 1890년대 말에 발달했다. 그리고 고감도 젤라틴 건판이 활용됨에 따라 노출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1878년에 레온 워너크는 `감광도계'를 소개했다. 사진가들이 점점 공적인 사건과 움직이는 대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이에 따라 많은 혁신이 따랐다. 특히 1890년 대에는 `빠른 일'에 적합한 포컬-플레인 셔터가 유행했다. 괴르츠-안쉬츠셔터는 1초에 1/10-1/1200에 달하는 상이한 90가지의 스피드가 가능했다. 제조업자들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이안 리플렉스 사진기를 생산했다. 그래서 조작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을 잡지 못하더라도, 진상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신종 사진업이 국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1900년에는 구경 조리개 제도(f/1 - f/6.4이상)가 파리의 국제대회에서 제정되었다. 1890년 대에 발명가들은 특히 활동적이어서 사진처럼 인쇄된 신문과 같이 획기적인 발명을 꿈꾸었다. 예술 사진가들은 머이브리지, 머레이, 안쉬츠 및 수동 촬영기사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만 점점 상징주의와 외형을 초월하는 기초적인 질서에 관심을 가졌다. 1900년, 예술운동은 영국에 널리 보급되어 있던 256개에 달하는 사진 단체들이 중심이 되었다. 영국의 중산층은 초창기 매체의 기술적 역사에 관해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저널 발행자와 학문 단체의 설립자들에게 열광적이었다. 1882년에 뮌휀의 게오르크 마이젠바하는 보통 인쇄자구의 활자로 이용될 수 있는 망판 블록 사진 제판법으로 특허를 받았다. 그리고 1890년에 필라델피아의 맥스와 루이스 레비는 평행선들이 식각되어 있는 래커를 칠한 유리들을 샌드위치처럼 포개 놓은 기구를 사용해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상업 망판 스크린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필라델피아 출신인 프레드릭 아이베즈는 선보다는 오히려 점을 이용하는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했다. 1890년 대 미국의 많은 잡지의 삽화들은 이 시스템으로 인쇄를 했다. 최초의 사진 망판 복제는 1880년 3월 4일자 뉴욕의 <데일리 그래픽(Daily Graphic)>에 실렸다. 마이젠 바하 오토타입 블록에 의한 최초의 망간 프린트는1883년 10월 13일자 라이프치히의 에 실렸다. 월간지모던 파리는 1896년 가을에 창간되었는데, 여기에는 파리의 생활을 스냅 사진에세이로 다루었다.그리고 프랑스 스포츠 잡지인 야외생활은 1898년, 창간되자마자 사진 기사를 화보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1900 - 1920

1907년에 뤼미에르 형제는 리용 공장에서 `컬러용 건판'을 상업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최초의 대중적인 컬러사진 제판법으로서, 1904년에 고안되었다. 이것은 염색된 감자전분을 사용했으며, 유리 감광판 위에 브롬화은 감광유제로 코팅하였다. 컬러영상은 수동 뷰어에 검사되거나 투영되었다. 이 제판법은 1930년 대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프레드릭 아이베즈는 보다 복잡한 컬러 시스템을 1890년 대에 실험했다. 사진 보도가 하나의 중요한 전문직의 위치까지 자리를 잡았다. 1903년 11월 런던에서 창간된 <데일리 미러(Daily Mirror)>가 독점 사진을 실은 최초의 일간 신문이었다. 맴 처음, 이 신문의 사진 취재기자들로는 그란트 형제와 탱크풀 스터디가 있었다. 그리고 중앙 통신사(Central News Ltd)같은 통신사가 설립되었다. 허버트 발드윈은 이 통신사에 일하면서 5in.×4in.(12.7cm × 10.2cm.)플래트 필름 ---우편에 유리함 ---과 예비의 3.5in × 2.5in.(8.9cm × 6.4cm.)차이스 - 팔모스를 지닌 이분의 일 감광판 괴르츠 사진기를 사용하여 1912년 터키 - 발칸전쟁에 관해 그의 책에 기록해 두었다. 이 괴르츠 사진기는 동물 움직임에 대한 전문가인 안쉬츠와 협력하여 1890년대에 개발되었다. 1900년에 차이스 렌즈를 가진 고몽(Gaumont) `스피도(Spido)'와 1903년부터 슈트가르트에서 제조된 콘텐사(Contessa) `네텔(Nettel)'이라는 또 다른 취재기자용 사진기가 있었다. 또한 입체 사진회? 예를 들어 허버트 폰팅이 일본에서 사진 촬영을 한 <언더우드&언더우드>는 사진대행사로 발전했다. 인화법도 발전했다. 글래스 고우의 T.& R. 아난, P.H.에머슨 및 후속 예술사 사진가들이 사용한 고급스런 정교한 방법인 그라비야 사진을 1879년에 고안한 칼 클릭은 1890년에 윤전 그라비야를 개발했다. 그라비야 인쇄법은 윤전기를 사용했다. 1905년에 독일의 는 윤전 그라비야로 인쇄된 최초의 주간지였다. 1911년에 와 1912년에 베를린의 이 그 뒤를 따랐다. 그것은 영구적인 고급 인화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단지 1930년 대에만 충분히 이용되었다.

▶1920 - 1933

스틸 사진술, 특히 르포르타즈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가 그 전성기였다. 1911년에 오스카 바르낙은 베를라르의 라이츠공장에서 현미경 제작에 관한 일을 했다. 영화 촬영술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1913년, 촬영 전에 노출계로 사용되는 가벼운 사진기를 개발했다. 이 사진기는 (24mm. ×18mm.)프레임 크기의 영화 필름을 휴대했다. 그는 확대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24mm. ×36mm.)로 프레임 크기를 배로 늘리고 36장의 사진 간격을 지닌 필름 스트립(film strip)을 선택했다. 디자인도 개선되고 베레크 박사의 수차보정 렌즈(anastigmatic lens)도 덧붙여져, 1924년에 라이카가 생산되었다. 이것은 처음 12년 동안 18만대가 생산되었다. 그 사이에 드레스덴의 에르네만사는 고속 촬영 에르노 슈타르렌즈를 부착한 엘마녹스를 개발하여 보통 전깃불로 실내 사진 촬영을 가능하게 했다.
이 방법으로 새로운 유형의 스냅 르포르타주가 1930년경에 생겨났다. 독일에는 많은 사진 저널들이 생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은 1890년에 창간되었다. 1920년 대 초, 이 저널의 편집자였던 쿠르트 코르프와 관리자였던 쿠르트 스차프란스키는 헝가리 출신의 마틴 문카치같은 포토 - 저널리스트를 채용하기 시작했다. 좌익계 저널은 베를린에서 1921년 창간되었다. 여기에서는 포토 몽타즈 작가 존 하트필트의 작품을 크게 다루었다. 그리고 1923년, 의 창간과 더불어 지방의 많은 잡지들이 뒤를 이어 생겨났다. 경쟁은 발전을 촉진시켰다. 베를린의 포토 저널리스트로, 1932년까지 엘마녹스를 사용했으며, 정치회의의 전문 취재기자였던 에리히 잘로먼이 있다. 그리고 뮌휀 잡지의 중요한 편집자로는 헝가리 출신의 스테판 로란트가 있었다. 이렇게 급성장하는 잡지들에 도움을 주기 위해 <데포트>와 <벨트룬트샤우>같은 사진대행사들이 1928년에 설립되었다. 앙드레 케르테츠와 E.P. 한 - 길란트는 시몬 구트만의 <데포트>와 더불어 중요한 사진가들이었다. 루시앙 보겔은 1929년 파리에서 잡지 <뷰>를 창간했는데, 이것은 1930년 대 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정권 장악 후, 독일의 포토 - 저널리즘은 점차쇠퇴해 갔다.

▶1933 - 1980

독일의 많은 출판인들이 히틀러를 피해 영국과 미국으로 건너갔다. 코르프, 스차프란스키, 아이젠스테트, 문카치 등은 1936년 11월에 창간된 <라이프>지에 관계했다. 그리고 1938년에 영국에서 창간된 <픽쳐 포스트>지에서는 스테판 로란트가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쿠루트 휩슈만, 페리스 만 및 팀 기달 같은 사진가를 채용했다. <픽쳐 포스트>지는 중요한 사진잡지로서 정치적, 재정적 위기에 처한 몇년 동안 민족 주체의식을 보강하도록 도왔다.
1930년 대에는 스페인 내란, 중국 및 이디오피아 전쟁, 유럽과 미국에서의 폭동과 파업 등 신사진가들을 위한 활동 영역이 많았다. 1939년과 1945년 사이에 대다수 사진가들은 전시 노역에 참가했다. 일반 유럽인들과 미국민들은 세계 소식을 열망하며 전쟁에서 벗어났다. 미지의 장소에 관한 사진 보도는 입수되기도 전에 사실상 널리 선전되어 있었다. 1947년에 로버트 카파, 앙리 까르띠에-브레쏭, 조지 로저 및 데이비드 시모어등은 포토 저널리스트들을 위한 국제 협력대행사 <<매그넘>>을 설립했다. 동양의 제정 붕괴와 중국 혁명, 아울러 한국, 인도지나 및 베트남 전쟁은 생생한 르포르타즈의 끊임없는 공급원이었다.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의 <이것이 전쟁이다!(This is War!)>(1951)에서 한국을 다룬 기사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의존한 사진기의 렌즈로 기록사진을 남겨 사진기 산업의 고도 성장과 사진술의 내적인 발전을 기록했다. 미국에서도 매년 사진술의 지위가 높아졌다. 1937년, 에드워드 웨스턴은 사진가로는 최초로 구겐하임 재단상을 수상했다. 그 이후 사진가들은 정기적으로 상을 받았다. 이미 워커 에반스, 폴 스트랜드 및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의 사진을 전시한 바 있는 뉴욕 근대 미술관은 1947년에 에드워드 스타인겐을 사진 부문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마이너 화이트는 1952년에 새로 창간된 계간지 <에퍼취>의 편집 및 제작부장이 되어 그것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1970년 대에 기호적인 일기 양식으로 새로운 안도감을 얻은 사진가들은 신속하고 직접적인 포지티브 폴라로이드법을 받아들렸다. 한 시기에, 포지티브를 만들기 위해 할로겐 은 네가티브 물질을 시용하는 이방법은 1939년에 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서류복사에 이용되었다.미국에서도 사진기 사용에대한 많은 연구가 있은 후, 1947년에 에드우 랜드가 폴라로이드법을 개발했다.
1963년에 이 제판법이 많이 개선되어 포지티브 컬러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추어와 전문가를 위한 컬러 필름은 1945년 이후에 널리 보급되었지만,사실상 처음 발매된 것은 1935년이었다.대부분 스튜디오 타입 컬러 사진기는 구식이었으며,인쇄업자들은 새로운 컬러 인쇄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택지가 상업적으로 생산된 것도 1930년 대였다. 열건조 인쇄 잉크는 활판 인쇄기로 발전했다. 1940년 대 이후 많은 개선은 최근 레이저 주사판과 컴퓨터의 도입으로 절정에 달하여, 전례없이 정확하게 인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Robert Capa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미국,  1913∼1954)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1931년   유태인 탄압을 피해 독일로 이주
1933년   파리로 이주
1935년   로버트 카파로 개명하고 본격적으로 보도 사진가로 나섬
1936년   스페인 내란 촬영
1938년   중일 전쟁 촬영
1942년   제2차세계대전 촬영
1945년   전쟁 종결후 미국시민으로 귀하
1947년   사진 통신사격인 '매그넘' 결성
1948년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 독립전쟁 촬영
1955년   인도차이나 전쟁 촬영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 우리에게 종군 사진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본명이다. 그는 평생을 종군 사진가로서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나버린 삶을 살았다.  나치정권의 탄압을 피하여 1931년 독일로, 1933년에는 파리로 이주를 해야만 했던 카파는 파리에 정착한후 본격적으로 보도 사진가로 나섰는데 1936년의 스페인 내란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전쟁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카파가 '전쟁 전문사진가'로 불리고는 있지만 사실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시대적 상황이 계속되는 전쟁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의 소재로 전쟁을 선택했던 것이다. 로버트 카파의 전쟁사진중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는 1936년 스페인 내란에서 찍은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Peath> 이 있다. 이 사진을 시작으로 로버트 카파는 포토저널리스트로써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프랑코가 독재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내란을 일으켰고, 인민전선파가 이에 대항하여 싸우던 상황에서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에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을 「라이프」지에 게제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결정적 순간인 것이다.   이 작품이 로버트 카파를 일약 스타로 만든 계기가 되었고 평생 전쟁사진가로 살게했다. 

노르망디상륙작전 (32229 bytes) 

"The landing at Normandy"  by Robert Capa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그때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사진이 떨린 상태이고 핀트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진에서는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욱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제2차세계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로버트 카파는 41살의 젊은 나이에 1955년 「라이프」지의 요청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로버트 카파의 전쟁사진들은 단순한 보도하는 입장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하나의 사진의 소재로 쓰였고 카파가 정작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은 전쟁이라는 가장 극한상황에서의 인간본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군과 적군이라는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인간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전쟁이라는 가장 급박한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평상시의 자신의 가식된 모습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로버트 카파는 촬영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관찰자적, 보도자적 입장에서 단순한 기록성을 위한 사진이 아닌 전쟁에 직접 참여한 참가자로써 급박한 상황아래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되고 1947년에 로버트 카파는 프랑스의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폴란드의 데이비드 시모어와 함께 사진원고 은행격인 '매그넘(Magnum)'을 결성하였다. 매그넘은 현대 사진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사진가 집단으로서 [보도사진의 본산]으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도 사진가들만으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이기도 했다. 매그넘을 창설하게 된 동기는 당시 언론기관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지는 보도사진의 경우는 사진가들의 독창적인 눈과 사상보다는 편집자 중심으로 운영되어 사진가들에게는 제약이 심했다. 따라서 사진가들의 창의성이 발휘된 사진 보다는 언론기관이 원하는 사진을 찍어야만 했기 때문에 기관에 얽매이게 된 셈이다. 이에 예술가로서의 주체성과 자유를 염원한 세사람이 뭉쳐 매그넘을 결성하게 되었다. 매그넘은 이전에 사진 유통체제를 뒤바꾸는 혁신적인 일을 하였는데 이는 사진가가 평상시에 찍고 싶은 사진을 찍은 후에 공동으로 보관하여 잡지사들이 필요한 사진을 사가도록 하는 체제였다. 이것은 보도사진을 편집자 위주에서 작가위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이 매그넘은 세계를 대표하는 보도사진의 본산이 되었고 이 집단의 실질적인 대표자가 바로 로버트 카파였다. 로버트 카파는 보도 사진가로서도 손색없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사진계에 있어서는 사진 유통방식 체제를 바꿔 끌려다니는 사진가에서 주도적 입장으로 보도 사진가들의 입지를 바꿔주고 창의적, 개성적 사진을 촬영하도록 하는 등 사진계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by Robert Capa 1936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후세의 사진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동생 코넬 카파는 1966년, 관심있는 사진을 위한 국제 기금(International Fund for Concerned Photography)'을 설립하였고, 1974년에는 카파가 촬영했던 사진을 보관할 목적으로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을 설립하였다.

미국의 전쟁기자 집단인 해외 취재클럽(Overseas Press Club)은 '로버트 카파상'을 제정하여 "대담한 용기와 진취적 정신이 이뤄내는 최고의 외신 사진"을 촬영한 사진기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그가 남긴 말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진실이야말로 최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The truth is the best picture, the best propaganda.)"
"전쟁은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 같다. 사진은 점점 잘 안 받으면서, 점점 더 위험해진다. (This war is like an actress who is getting old. It is less and less photogenic and more and more dangerous.)"
"당신이 재능이 없다면, 당신 또한 헝가리인일것이다. (It's not enough to have talent, you also have to be Hunga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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