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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레이와 세계사진역사전'을 보고도 안 썼던 감상문을 쓰는 것은 윌리 호니스의 사진에 유다른 감동을 받아서는 아니다. 정리하기 좋아서가 하나의 이유고('만~역사' 전을 정리하느니 좋은 사진史 책 한 권을 소개하는 게 나을 것이다), 몇 가지 기억해둘 것이 있어서가 또 하나의 이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류의 사진은 아니다. 물론 매우 훌륭했지만.

  

  

1. 작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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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름. 윌리 로니, 윌리 로니스, 윌리 호니, 윌리 호니스... 무엇이 진실인가? 프랑스 태생의 유태인이라는 Willy Ronis의 한글 표기를 두고 주최측에서는 '윌리 호니스'라고 썼다. 전시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상물에 나오는 현지 지인들의 발음을 들어봐도 똑같이 들린다. 프랑스에서는 이름에서 불어 본래의 발음법을 무시하고 본인이 주장하는 발음대로 불러주는 것이 상례라고 한다. 그런데 혹자의 주장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윌리 로니스'라고 써야 옳다고 한다. 불어의 'r' 발음은 분명 한글 'ㅎ'보다 'ㄹ'로 해야 맞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시인 '행보'가 되고 중세 이후 '흐네상스'가 될텐데 당신 책임질 거냐고 따져묻는다. 그렇다면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진 에이전시 역시 '라포'냐 '하포'냐 하는 문제가 잇따른다.(주최측에서는 이 역시 기존과 달리 '하포'로 표기하고 있다.) 나야 뭐 아나. 다만 일반적인 불어식 발음과 달리 끝의 's' 발음을 꼭 살려야 맞다는 것만은 확실한 모양이다. 일단은 내 귀에 '호니스'로 들리니 '윌리 호니스'로 적기로 한다.


1910년생, 현재 97세.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로베르 드와노와 함께 '프랑스 3대 휴머니스트 사진가'로 분류됨. 쟁쟁한 거장들이 타계하고 난 지금 단연 현존 최고의 프랑스 사진가로 추앙받고 있음. 다만 과거에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말년으로 올수록 재평가 대상이 되어온 모양.


프리랜서 보도사진가로 시작, 빠리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인들의 일상을 담는 것을 주력분야로 삼아옴. 그러나 보도사진은 물론 한때는 광고사진도 찍었으며, 말년을 중심으로 누드사진도 상당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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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방스 누드, 1949

  

  

2. 작품에 대하여


20대부터 80대까지 초지일관으로 한 가지 스타일을 고수해왔다는 것은 과연 높이 살 만한 노릇이다. 청년기가 그리 서툴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년기가 그리 바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화질에서의 선예도와 노이즈 차이가 없었다면 어느 시기에 찍은 것인지 식별이 쉽지 않을 정도다. 발전이 없다기보다는 완만한 계조가 살아있는 변화가 느껴진달지. 이만큼 초지일관하기도 쉽지 않은 일일 것 같다.


한 마디로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이 사람의 특징인 것 같다. 브레송이 '쿨'하다면 호니스는 '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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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는 뱅상(주: 그의 아들), 1946

   

  

그러나 이를 밋밋하거나 평범한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내가 보기엔 매우 탁월하고 비범한 구도감각과 순간포착 능력을 가진 사람같았다. 인내심과 성실성, 친화력 등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건 중요한 부분이다. 일상의 소중함이니 이웃들의 꾸밈없는 모습이니를 운운하며 지루하고도 심심하기 짝이 없는 사진을 남발하는 사람들, 참 많다. 일상을 일상 그대로 판박이하려면 CCTV 설치해놓고 24시간 돌리면 되지 뭐하러 사진으로 찍는가. 바로 이런 데서 옥석이 구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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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nise Fondamenta Nueva, 1959

  

   

어쨌거나 당장에 튀어보이는 작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브레송에서 느껴지는 실로 예리한 통찰력과 카리스마(달래 '사진의 선승'이겠는가)나 로베르 드와노의 유머 감각과 리듬감처럼 겉으로 확 드러나는 무엇은 적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간 과소평가되어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게 (영상물에 등장하는) 지인들의 증언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


일상을 주로 담았다고는 하나, 정치적 성향(좌익)은 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2차대전 등 격동의 시대를 겪어오면서 정치적으로 곡해되는 것이 싫어 오히려 일상에 집중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활동 초기인 30년대부터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작업을 했으며, 젊었을 때는 파업현장 등을 주로 취재하다가 점차 방향을 전환했다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일상적'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서민적'인 것과 동의어라서 여전히 그는 공산당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의 하나라고 한다.(그런데 조선일보가 전시회를 주최했다!?!)


빠리 혹은 프랑스만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가 많이 등장하고, 그밖에 영국이나 독일도 좀 나온다. 다만 유럽을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이 점 역시 브레송과의 큰 차이겠다. 아, 유명인사를 찍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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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띠유 광장의 연인, 1957

   

  

3. 작업방식에 대하여


그는 숨어서 찍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연출도 안 했다고 한다. 사람은 물론 물건 하나 위치도 일부러 바꾸지 않았단다. 이 말은 물론 찍힌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찍을께요"나 "찍었어요"라고 말해줬다는 뜻은 아니다.(상황상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군중 사진같은 것도 여럿 있다.) 말을 하건 하지 않건, 상대방이 알아차리건 말건 숨어서 몰래 찍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숨지 않았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드러내고도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중요한 참고가 된다. 드러내고도 성공하는 비결을 익혀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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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bagne, 1947

   

   

반면 후보정에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던 모양이다. 필름 시대의 많은 프로사진가들이 그렇듯 그 역시 인화전문가와 분업을 했는데, 25년간 그의 사진을 인화해왔다는 전문가는 인터뷰를 통해 부분적인 노출보정(디지털 식으로 말하면 뽀샵질이다) 사례를 시연해주며 "이러한 작업 모두를 손으로 한다(주: 손으로 그림자를 지게 해서 부분적인 노출보정을 한다는 뜻). 그래서 내가 인화한 같은 사진이라도 결과물이 매번 조금씩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그 사례는 호니스의 대표작 중 하나였으며, 25년간 함께 해왔다니 호니스 본인이 모를 리 만무하다. 필름이든 디지털이든 후보정은 안 하거나 최소화하는 게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이 될 듯하다.


카메라는 35mm와 중형을 함께 사용했다. 판형을 봐도 그렇지만, 셀프 사진에 TLR을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이 있다.


모든 사진은 흑백으로만 찍어온 모양이다.

  

  

4. 전시회에 대하여


잘 된 전시회였다. 우선 작품의 양이 상당해서 즐거웠고, 전시방식도 무난했던 듯하다.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역시 준비된 동영상이었다. 주최측이 이 전시를 위해 현지에 직접 가서 작가와 지인들의 인터뷰와 자료화면들을 찍어온 모양이다. 귀감이 될 만한 사례다. 2월말까지 휴관일 없이 계속한다고 하니, 놓치지 말고 꼭 보실 것을 권한다. 공식홈페이지 http://www.willyronis.net 를 통해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다.



5. 그가 남긴 몇 마디


"사진가에게 아주 중요한 덕목은 인내심, 고민, 우연, 그리고 시간이다."


"아름다움은 길 위에 있다."


"충격적인 사진은 내 장기가 아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란 가슴을 통해 만들어지는 기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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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빠리지앵,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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